
거짓처럼 봄은 다시 오겠지
길가에 붉은 장식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나무 위에 밝게 빛나는 별로 장식해두기도 하고, 형형색색의 전구들을 이용해서 길거리를 꾸며놓기도 했다. 밤에 길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그 길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답지 않게 감성에 젖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날,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이러한 화려함은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일 년에 단 하루뿐이라면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입가에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추위에 목폴라를 위로 잡아 올리며 걸어 나갔다.
오늘은 토비와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오늘은 면박 주는 것은 조금으로 줄여줄까. 바보 같은 행동을 하면 날려버릴 거지만, 조금쯤은 장난으로 넘어가줘도 되겠지. 오늘은 사랑한다는 말도 거리낌 없이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말을 들은 너는 감동을 받아 바로 입을 맞춰올지도 모르지. 나는 오늘이 좋은 하루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보같이, 언제나 모든 일은 급작스레 찾아오는 것임에도 평화에 안주했다. 네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선배, 오늘 약속 잊어버리신 거 아니죠? 여섯 시에 광장에서 만나요. 그런 토비의 말에 몇 번이나 약속을 재확인 시키는 너에게 알고 있다며 타박을 주었다. 알고 있다고, 음. 그 말을 일주일도 전부터 들었어. 쿨하게 굴라고, 토비! 그리 말하면서도 토비가 얼마나 나와의 약속에 기대하고 있는지 역력하게 드러나서 입가에 그려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우습게도 사랑받고 있다는 그 사실에 복에 겨운 행복을 느꼈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그 감정이 속없이 달콤하기만 했다. 사랑하는 이의 표정을 본 적이 있는가? 키스 한 번에 흐물흐물한 얼굴을 하며 사랑스러워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 껴안는 이의 표정을 본 적 있는가? 그까짓 손 하나 잡는 데에 상대방의 눈치를 봐가며, 타이밍을 재며, 손가락 끝으로 슬며시 잡는 이의 표정을 본 적 있는가? 그런 표정을 보고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오직 나를 볼 때에만 무방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어찌 사랑에 빠져들지 않고 배길 수 있는가. 그래.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네 귓가에 영원을 속삭이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네 검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옆에서 함께 살아간다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도 사랑했다.
5시 40분, 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한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는 너였기에 이미 도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서두를까 했으나 아직 약속 시간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내고는 발걸음을 늦추었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퍽이나 많았다. 어디를 그리도 바삐도 가는지, 한산하기만 했던 길거리에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다. 인산인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목적은 비슷해보였다. 연인을 만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다들 저마다 입가에 옅은 미소 하나씩은 걸고 있었다. 설렘, 행복, 사랑. 벅참, 감격, 싱그러움, 다정함…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있었다. 다른 날에 보았더라면 유난이라며 혀를 내둘렀을 법도 했으나 오늘은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유쾌하기만 했다. 오늘은 평범한 날이 아닌 크리스마스였기에. 또한 다른 이들과 유사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5시 57분, 너와 약속했던 광장 아래에 도착했다. 남들보다 큰 키를 가지고 있었던 너였기에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음에도 네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인파 때문인가 싶었으나 광장에서 서서 기다리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너를 발견할 수 없을 리가 없었다.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6시 2분, 너는 없었다. 조금 늦는 걸까. 연락도 없이 늦을 리 없을 텐데. 미간을 조금 좁히며 토비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안 오면 버리고 간다, 음!] 18:03 (1)
[핸드폰은 장식으로 들고 다녀?] 18:12 (1)
[보면 연락해] 18:19 (1)
[오다가 잠에 잠들었냐고, 음!!] 18:25 (1)
메시지를 보지 못할 상황인 건지, 잠이라도 자는 것인지 대화 방에 표시된 1은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일주일 전부터 먼저 사람을 들들 볶은 것이 누구인데 늦는다니. 말이 되는가? 오면 시원하게 등짝 한 대를 날려줄 생각이었다. 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손가락을 살살 풀었다. 미안하다며 사과해온다면 조금쯤은 툴툴 거릴 생각이었다. 두 번째로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걱정이 되었다. 제멋대로이며, 남 놀리기 좋아하는 그였지만 30분 넘게 사람을 추위 속에 세워두며 연락 하나 보내지 않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오다가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난 것일까, 개인적인 사정이 생긴 것일까. 한 손으로 머리카락 끝을 배배 꼬며 아무런 연락 없는 야속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6시 36분, 네가 아직도 연락 하나 보내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 늦는 것이라며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매서운 추위에 손가락에 제대로 된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라도 해보려 핸드폰 화면을 켰다. 하지만 얼어붙은 손가락 탓에 몇 번이고 타자를 잘못 눌러서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뚜루루, 뚜루루… 전화 연결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반복적인 기계음 소리가 계속되다가 마지막에는 높은 미성의 목소리를 가진 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반복해서 전화를 거는 것밖에 못하는 사람처럼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제 속도 모르고 핸드폰은 계속해서 반복적인 기계음만을 끝없이 되풀이 했다. 6시 52분,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버려서 이미 예약해둔 레스토랑에 가는 것도 불가능 할 것 같았다. 하염없이 광장에서 기다렸다. 모든 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 시간들 속에서 홀로 멈춰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행복한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추위에 붉게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7시 3분, 연락이 닿기는 한 것일까 의심될 지경에 이르렀다. 네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채였다.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바람이라도 맞은 건가. 그런 생각에 실소를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이리도 처량하게 만든, 불쌍히 만들어버린 이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가슴이 텅 빈 듯 공허했다. 버려졌다는 감정이 생생했다. 진실이 아닐지라도, 그 감정만이 가슴속에 남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을 흘려도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도록, 그렇게.
7시 21분,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연락이 온다면 무시해버릴 것이라 다짐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음에도 마음과 다르게 시선은 핸드폰으로 자연스레 옮겨졌다. 토비에게서 온 전화였다. 받지 말까,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지금은 퍽 감정적인 상태라서 전화를 받는다면 모든 감정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전화하며 눈물을 흘리는 연인, 나는 얼마나 더 비참해질까. 하지만 이대로 전화를 무시해버린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당시에 든 생각이 그것뿐이었다. 코를 훌쩍이고, 목을 가다듬고 울었다는 기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모든 준비를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토비, 왜 이제야 전화를……”
“토비 환자분이랑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한두 시간 전쯤부터 긴급 수술이 들어갔는데 환자의 핸드폰이 망가져서…… 연락이 늦어졌습니…….”
“…네? 토비가, 환자, 수술…? 병원이 어디야!”
“OO병원 응급 치료 센터입니다.”
알 수 없는 내용뿐이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아주 단편적인 단어들밖에 없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토비가 환자라는 사실, 현재 수술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벅찼다.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몸에 힘이 풀려서 어찌 해야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덜덜 떨려오는 오른 손을 왼 손으로 받치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택시, 택시! 제발, 여기 택시 좀… 제발……
타이밍 좋게도 근처에 있던 택시가 앞에 섰다. 택시에 올라타며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소리 쳤다.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버겁기 그지없었다. 모든 것이 무섭기만 했다. 제발 꿈이기를 빌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토비가 쉽게 죽을 리 없다고, 괜찮을 것이라고. 그리 빌었다. 살며 찾아본 적 없는 신에게 기도했다. 무사하길 기원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지갑에 있는 지폐를 모조리 택시 기사에게 넘긴 후 뛰어나갔다. 분주함이 가득 들어찬 응급실 센터를 뛰어다녔다. 뛰면 안 된다고 만류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제대로 들을 정신이 없었다. 토비, 토비 환자 어디에 있어요? 지금 수술중이라는데, 어디예요? 제발, 아무나! 그리 소리치는 나의 모습에 간호사 한 명이 따라오라며 나를 이끌었다. 자꾸만 힘이 풀리려고 하는 다리를 한계까지 움직이며 간호사를 뒤쫓아 갔다. 7시 48분, 나는 악몽 속에서 숨 쉬고 있다.
수술실 앞에는 보호자가 기다릴 수 있도록 설치된 의자가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으나 들어갈 수 없다는 간호사의 말에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토비는 교통사고로 들어왔다고 했다. 5시 49분쯤 시민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빙판 길에서 미끄러진 화물차와 3중추돌이 있었는데 토비가 차량의 운전자였다고 했다. 기름을 옮기던 화물차여서 불길이 거셌다고 했다. 최대한 빨리 구출하려 했으나 화재 진압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가장 앞에 위치해있어서 불만 나지 않았더라면 수술까지 가지 않았어도 될 상황이었으나 연속해서 일어나는 폭발 때문에 전신에 화상을 입고 한 쪽 다리가 완전히 뭉개졌다고 했다. 또한 사고 당시에 깨졌던 유리 조각 파편들이 복부에 박혀서 그 조각들을 추출하는 과정 탓에 수술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전신에 화상을 입어서 짙게 흉터가 남아도 상관없다. 오른 다리를 의수를 쓴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며칠, 몇 달, 몇 년이든 좋았다. 네가 병원에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해도, 재활 기간을 오랫동안 거쳐야 해도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살아서 수술실에서 나오기만 한다면 무언들 좋았다. 살아 숨 쉬는 너만 있다면 무언들 좋지 않으랴. 나는 간절히 빌었다. 의사가 나에게 좋은 소식을 건네주기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와중에도 너를 위해 기도했다. 8시 3분, 나는 악몽 속에서 숨 쉬고 있다.
자리에 앉아서 손톱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불안함 속에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연락을 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곧 수술실에서 나와서 회복할 텐데, 금방 나을 텐데 다른 사람들에게 괜히 걱정 시켜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게도 다른 이에게 연락을 한다면 위중한 상태임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랬다. 나와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여줄 너인데, 조만간 나를 보며 놀랐냐고 너스레를 떨 너인데 구태여 다른 이들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랬다. 8시 12분, 나는 악몽이 아님을, 꿈이 아님을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오늘이 좋은 하루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보같이, 언제나 모든 일은 급작스레 찾아오는 것임에도 평화에 안주했다. 네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밖은 여전히 붉은 장식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나무 위에 밝게 빛나는 별로 장식해두기도 하고, 형형색색의 전구들을 이용해서 길거리를 꾸며놓기도 했었다. 밤에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그 길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답지 않게 감성에 젖어드는 것 같기도 했었다. 많은 이들이 기다리던 날.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